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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HIFIMAN / 손쉽게 레퍼런스 이어폰 확보하기



HIFIMAN / RE-400



글, 사진 : 루릭 ( http://blog.naver.com/luric, @LuricKR )

 

 

중국 산신령의 오디오 피델리티


수년 전 Head Direct라는 중국 회사가 RE0라는 이어폰으로 조용히 시장을 흔들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플래너 마그네틱 드라이버의 헤드폰은 뛰어난 사운드와 함께 중국제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높은 가격으로 묘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지요. 그만큼 소리에 자신이 있다는 것인데, 제가 이 회사 물건을 좋아하는 이유는 타협이나 잔머리(?) 굴리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남들이야 어찌 말하던 간에 자신이 만들고 싶은 소리를 만들어서 그대로 밀고 갑니다. 브랜드 명칭이 HiFiMAN으로 바뀐 후에도 여기에서 내놓는 이어폰, 헤드폰 제품들은 변함 없이 매니악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변함 없는 특징은 소리를 최대한 왜곡 없게, 플랫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플랫에서 고음만 좀 강조하거나, 플랫에서 중저음만 '평평하게' 강조하는 식입니다. 덕분에 뛰어난 밸런스와 중립적 음색(밝거나 어둡지 않은)을 원하는 유저들에게 하이파이맨 제품들이 잘 먹히는 편이지요. 적어도 하이파이맨 헤드폰들은 왜곡감으로 감성을 자극하는 쪽이 아니며 오디오 피델리티로 승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때 저는 하이파이맨 제품의 소리를 중국 산신령이 튜닝하는 줄 알았습니다. ...물론 그럴 리는 없구요... 이 회사의 사운드와 제품 디자인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Fang Bien이라는 아저씨인데 대충 이렇게 생겼고 이런 말투를 가진 사람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01bTVrnMMhg


http://www.innerfidelity.com/content/2013-munich-high-end-show-hifiman-re-400-and-re-600

 
초창기 RE0, RE1, RE2 등으로 시작된 이어폰 라인업은 이후 RE252, RE262 등으로 이어졌는데 이 제품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Fang Bien 아저씨는 얼마 후 색다른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소형 다이내믹 드라이버의 진동판에 티타늄 코팅을 한 RE-400, RE-600을 내놓은 것입니다. 티타늄 코팅 진동판은 이어리시버 업계에서 꽤 흔한 기술이지만 하이파이맨의 입장에서는 소리의 큰 변화를 의미하는 변수였습니다. 저는 현재 RE0를 사용 중이고 예전에 RE262를 빌려서 후기를 작성한 적이 있습니다. 제품의 사운드 변화는 비교적 알아보기가 쉬웠습니다. RE0는 멋진 밸런스와 함께 선명한 고음으로 세밀한 소리를 들려줬고, RE262는 고음은 낮춰진 반면 중저음을 평탄하게 강조해서 편안하고 든든한 소리를 냈습니다.



RE-400의 겉모습은 대단히 평범합니다. 은색 알루미늄 하우징은 마치 표주박처럼 생겼는데 크기가 무척 작으며 아래쪽으로 큼직한 덕트 홀이 뚫려있습니다. Y-스플릿 아래는 직조 케이블, 위는 비닐(?) 케이블로 혼합된 케이블 구성도 특이하군요. 아마도 내구성 확보와 함께 케이블이 옷에 닿을 때 발생하는 노이즈를 줄이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부 비닐 케이블로 된 RE0보다는 케이블 터치 노이즈가 적지만, 역시 셔츠 클립으로 옷에 고정시켜주는 편이 좋겠습니다. 다수의 필터와 함께 여러 종류의 이어팁이 들어있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수수한 모습이지만 하드 케이스가 있는 것도 실생활에서 유용하지요. 생김새는 평범하지만 RE-400은 귀에 깊숙이 착용되며 휴대하기도 편하고 차음 효과도 좋습니다. 이어폰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늘 플랫에 가까운 소리로 여러 가지 음악을 즐기며 마음 편하게 이어폰을 휴대하고 싶다면 이만한 물건도 드물 것입니다. 



플랫, 뉴트럴에 가까운 사운드

든든하게 보완된 저음과 확장된 공간감

 


ㆍDriver Unit : 8.5 mm Dynamic

ㆍFrequency Response : 15 Hz ~ 22 kHz

ㆍImpedance : 32 ohms

ㆍSensitivity : 102 dB




RE-400은 헤드폰 앰프가 없어도 소리 전체의 양감이 좋고 디테일도 잘 잡히는 제품입니다. 그러나 RE0와 마찬가지로 앰프를 연결하면 중저음의 질감이 더욱 향상되므로 거치형 헤드폰 시스템에도 어울립니다. 아이팟 나노 7에 바로 꽂아서 편리하게 사용할 때에도 좋은 소리를 즐길 수 있고, 실내에서 보다 진지한 음악 감상을 하고 싶을 때는 스베트라나와 그람슬리 솔로에 번갈아 연결해서 듣습니다. 이어폰이 워낙 밸런스가 좋고 소스를 타지 않다보니 쓰는 사람 마음도 편하군요. DAC나 포터블 뮤직 플레이어 사운드를 체크할 때 좋을 듯 해서 저도 이 제품을 하나 구입해둘 예정입니다.


 

뉴트럴(Neutral)이라는 단어를 소리에서 구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RE0는 가장 중립적인 음색과 왜곡 없는 사운드에 거의 근접한 제품이었지만 고음의 '찌릿'한 강조가 있습니다. RE-400은 뉴트럴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RE0의 찌릿한 고음을 조절하고 저음과 입체감을 보강한 제품으로 보입니다. RE0를 사용해본 사람이라면 RE-400의 소리를 처음에는 심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들으면 들을수록 담백한 맛에 빠져들 것입니다. 이 음색은 오히려 ER-4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ER-4보다 저음이 풍부하고 공간이 넓게 느껴지는 소리입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밸런스와 중립성을 주제로 하는 이어리시버의 감상문 작성은 너무 어렵습니다. 이전에 살펴봤던 베이어다이내믹 T90 헤드폰처럼 강한 개성이 있는 제품이라면 마음껏 글을 지를 수가 있는데... ER-4, RE0 못지 않게 뉴트럴 사운드를 내는 RE-400은 저에게 더욱 어려운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한 많은 특징을 뽑아내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RE-400의 첫번째 특기는 낮은 영역만 조금 강조된, 거의 플랫한 고음역입니다. 얼핏 들으면 너무 수수하고 담백해서 기억에서 잊혀져버릴 정도지만 감상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정확한 비중과 선명도에 맛을 들이게 됩니다. 전체 음색을 맑게 해주며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중립적 감각으로 이끄는 고음입니다. 그리고 드럼의 하이햇 심벌즈나 트럼펫의 고음 등 금속성에 가까운 소리가 나올 때 듣기 좋은 자극감이 드러납니다. 거의 부각되지 않은 고음을 들으면서도 귀가 전혀 갑갑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중음역은 고.저음에 비해 밀도가 높으며 명료한 인상을 줍니다. 어찌보면 '중음역 최적화 이어폰'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인데, 중음역을 기준치보다 끌어올려서 소리 전체를 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기준치다!'라고 할 정도로 정확한 비중의 중음역을 표현합니다. 그 덕분에 보컬과 현악기는 위치가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잡히며 선이 굵고 명료하게 들립니다. 또한 여성 보컬이나 바이올린 음의 색채가 밝게 꾸며지지 않기 때문에 위화감이 거의 없으며 디테일의 묘사도 뛰어나서 딱히 흠 잡을 부분이 없군요.


평탄하면서도 초저음역까지 깊게 내려가는 저음도 마음에 듭니다. RE-400의 저음은 부스트가 많지 않고 스케일이 비교적 작기 때문에 웅장한 맛은 적습니다. 그러나 빈약한 저음을 완전히 피하면서도 고.중음역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만 보완된 세팅이 RE-400의 소리 전체를 명료하게 만들어줍니다. RE0를 사용하면서 '정말 좋은데 저음의 존재감이 너무 없어!'라며 불평하던 유저라면 RE-400의 저음을 웅장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레퍼런스 이어폰으로 ER-4S를 쓰면서 가장 불만스러웠던 부분은 좁은 공간감입니다. 케이블 교체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스테이지 넓이를 정확히 표현하도록 세팅된 이어폰의 소리를 억지로 왜곡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RE-400은 ER-4와 무척 유사한 음색을 내면서도 이 공간감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완만하게 보강된 저음이 배경을 넓게 깔아주는 느낌도 있고, 하우징 내부에서 즐거운 울림 효과가 만들어져서 음악이 연주되는 스테이지가 탁 트이는 경험을 할 수 있더군요. 또한 볼륨을 올릴수록 생생하게 살아나는 입체감은 이 제품이 처음부터 공간감을 염두에 두고 설계됐음을 짐작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엉뚱하게도 장점이자 단점이 되는 특징으로 이어집니다. 고음이 평탄하게 조절된 것도 원인이지만, RE-400의 전체 해상도는 생각보다 높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가격대에 못 미치는 수준도 아닌데, 제 기준으로 본다면 약 20만원 정도의 가치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RE0의 해상도에 30만원 정도의 가치를 매기고 있습니다. 현재 가격은 10만원대입니다만...) 음 전체에 잔향이 많은 편입니다. 생각보다 왜율이 높게 느껴지는 소리로, 귀가 편안해서 좋긴 하나 소리가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군요. 딱딱 끊어치는 맛이 없으니 '정확한 반응'의 감흥은 줄어듭니다. 그러나 정확한 소리로 인정 받는 ER-4도 은근히 왜율이 높음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잘 맞춰진 밸런스와 잔향감의 조화는 사람의 귀를 무척 편안하게 해줍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자연스러움'은 그런 종류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끔씩 이어폰의 소리에서 '정보량이 너무 많아 피곤하다'는 평가를 볼 수 있는데 RE0의 경우가 딱 그렇습니다. RE0와 달리 RE-400은 해상도를 다소 희생하더라도 잔향감을 통해 피로감을 제거하고 몇 시간씩 들을 수 있는 편안한 소리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중.저음을 명료하게 분리하는 능력은 좋게 느껴집니다. 약간 굵은 입자로 귀 속에 마구 번지는 잔향감 속에서도 각 음역이 제 위치를 잡고 있습니다.



음악 장르 매칭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듯 합니다. 이 물건은 어떤 음악이던 간에 강조하거나 축소하는 성향이 없습니다. 레코딩된 소리를 그대로 표현한다기보다는 이어폰에서 스스로 정직한 소리를 만든다고 할까요. RE-400은 현재 이 가격대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올라운드 플레이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재즈를 들어도 단정하고 차분한 재즈, 락을 들어도 단정하고 차분한 락, 일렉트로니카조차도 귀에 부담 없는 소리의 일렉트로니카가 됩니다. 클래식 악곡은 거의 완전한 무색무취의 음색으로 들을 수 있지요. 이것은 곧 뭘 들어도 평범하다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레퍼런스, 즉 기준점이 되려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게 맞겠으나 막상 실제로 그런 결과를 겪어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칩니다. 그래서 곧 RE-400을 구입하기 위해 10만원대의 결제를 할 때 저는 아마도 '재미난 이어폰의 구입'이 아닌 '여러 가지 뮤직 플레이어 체크를 위한 장비의 구입'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ㆍ루릭이 들어본 HiFiMAN RE-400의 소리는?

해상도 : 가격에 비해서는 높은 편.

타격감 : 약간 짧고 탄력 있는 저음 타격.

공간감 : 넓음.

치찰음 : 거의 없으며 필요할 때만 살짝 드러나는 치찰음.

자연스러움 : 고.중.저음의 연결에서 자연의 섭리를 느낄 수 있음.

고음역 : 대체로 플랫하며 낮은 영역만 약간 강조된 맑은 음색의 고음.

중음역 : 높은 밀도와 정확한 위치, 비중을 지닌 중음.

저음역 : 초저음역까지 평탄하게 내려가는, 강하지 않으면서도 든든한 저음.